검룡소에서 금대봉으로 향하는 도중부터 하염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가는데까지 가 보자는 심산으로 분주령에서 금대봉을 향하다 결국은 하산하기로 결심했다. 하산을 결정한데는 물론 카메라의 시계가 잘못되어있었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2시간이나 먼저가고 있던 시간을 믿고 계산을 해 보니 시간대가 맞지를 않아 하산을 결심한 것이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보다 더 빡빡하게 일정을 짜 놓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생각보다 하산이 빨랐던 관계로 시간이 오히려 남아도는 형국이 되었다. 근처의 주요한 경치를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고 삼수령(피재), 매봉산 바람의 마을을 둘러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녁이 되어서 갈등이 밀려든다. 기상예보를 보니 5월 27일 태백은 흐린 날씨이지만 영월을 맑은 날씨이다. 영월 단종의 비애를 담은 길을 따라 다니면서, 주천 요선암의 바위와 선돌(소나기재)에 정신을 놓고 있던 탓에 주변만을 겉돌았던 청령포와 단종의 장능에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영월에 가서 김삿갓 유적지 근처에 숙소를 마련한다면 적어도 영월의 기본적인 자연유산과 사적지들을 돌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백에 남아서 금대봉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태백산 일정으로 보상받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혼자 차로 이동을 하다보니 역시 태백산도 정상에 쉽게 오르고 즐기면서 내려올 수 있는 코스를 정할 수 밖에 없다. 코스는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우선 태백산 민박촌으로 향했다. 웹과 현실에서 성수기의 차이가 보이지만, 다른 숙소를 찾기도 귀찮아서 그냥 일박을 하기로 했다. 일찍 자야 빨리 일어나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동주를 시켜서 수면제 대용 반주로 식사를 했다. 역시 소주 타입이어서인지 동동주 4잔을 먹으니 배가 불러서 더 이상은 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동동주가 많아서 남겼다고 하니 내일와서 다시 먹으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다정스럽다. 방에서 인터넷을 보며, 가장 짧고, 편해보이는 코스로 유일사를 잡아 놓고 잠에 빠져든다.
<구름 속 산행이 예상되는 아침 구름>
<비와 이슬을 머금고 있는 꽃>
<유일사 매표소 주차장 : 오후 5시에는 모두 퇴근, 슈퍼도 문을 닫았다>
내일은 개어있어 화창하겠지하고 생각을 하다 다시 잠들고 깨기를 몇번을 했다. 아침에는 비는 그쳐있었지만 심상치 않은 구름을 보며 걱정이 앞선다. 어제도 비 쫄닥 맞으며 걸었는데, 오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름이 산 중턱부터 차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답답해 진다. 그렇지만 상쾌한 공기와 빛물과 이슬이 하나가 된 아침 분위기에 답답한 마음도 어느새 수그러든다.
유일사 매표소 앞 조그만 가게에서 몇가지 주전부리감을 구입하는데, 태백산행을 하려는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의 일행은 컵라면을 시켜서 먹고 있다. 라면의 유혹이 이처럼 강할 줄은 몰랐지만, 괜히 급한 마음에 식욕을 억누르고 산으로 향한다.
아직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은 기상 상태에 감사하면서 언제부터 구름 속 신선놀이 산행이 시작될 지 궁금해 지고 금대봉에 오르지 못해 보지 못했던 야생화 몇 송이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가져본다. 오늘 산행은 천제단에서 중단하기로 마음을 먹고 서서히 산행을 시작했다. 초반부터 힘빼면 산행의 절반은 실패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경치고 경관이고, 아름다움이고 멋짐이 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남는 것은 가쁜 숨과 땅 위의 흙과 돌맹이 뿐이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상에 오르는 과정도 중요하다. 산행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우선 눈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적을 만들고, 원수를 쌓기도 한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산행에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어느새 산은 구름 속에 갇혀있다. 몇 미터 앞의 나무도 짙은 연무 속에서 형태만을 드러내고 있다. 뒤에 남아 컵라면을 먹던 일행이 지나쳐 간다. 산행이 힘들다고 투덜대면서 걷던 한 명이 일행에서 뒤떨어져 혼자 걸어가면서도 전화를 받고 있다.
<라면을 먹고 올라 온 등산객, 신선이 구름 속을 걷듯이 앞서서 간다>
<유일사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주목,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
어느새 도착한 유일사 입구, 100미터를 내려가면 유일사이다. 지금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유일사는 비구니들만 있는 산사이다. 돌계단을 바라보니 주요 자재와 생필품을 운반한다는 조그만 케이블카를 태워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직 공사 중이고 역사 깊은 유적이 있는 절은 아니지만 계단 아래로 내려가 본다. 색이 고운 야생화가 이슬을 머금고,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맞이해 준다. 마치 유일사가 주는 느낌만큼이나 깨끗하고 단아하다. 이상하게도 비구니만 있는 암자나 절은 선입견 때문인지 모르지만 꾸며진 모습이나 분위기 자체가 여성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견성을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분리된 인간의 성을 가식적이거나 생계를 위해서 과장하고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완전히 발휘하면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러운 여성성이 표현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공사도 비 온 다음이어서인지 중단되어 있어 인부조차도 보이지 않고, 사진 몇 장을 찍으면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도 누구하나 내다보며 간섭조차 하지 않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유일사를 나가면, 올라온 계단만큼은 아니어도 좀 어려운 등산로가 남아있다. 트랙킹이라고는 하기에는 어렵고, 등산을 하였다고 하기에는 좀 짧은 등반로이다. 유일사 전부터 시작되는 주목들이 군락을 이룬다고 하는 등반로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은 그리 크게 자라는 수목은 아니지만, 그 모습은 사람의 눈을 잡아두기에 충분하다. 특히 오늘처럼 구름 속에서 앞을 구분하기 어려운 날에는 동화 속에 나오는 살아 움직이는 나무와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부터는 다양한 봄철 야생화들이 좁은 등산로에서 잘 보인다. 삼각대를 가지고 올 수 있고, 더 큰 랜즈를 갈아 끼울 수 있지만, 그런 작업을 하기에는 좀 힘이 부치는 산길이다. 어제 금대봉 가는 입구 안내소에서 받은 야생화 안내 팜플렛을 꺼내어 들고, 꽃들의 이름을 맞추어 본다. 그렇지만 소개되지 않은 다양한 야생화들이 산길을 따라 피어있다. 서점에라도 들러 한국의 자연과 야생화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야생화와 주목의 모습을 보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커다란 주목이 보이고 이제 정상에 거의 다다렀음을 알려준다. 첫째 천제단은 조금은 작은 규모이고 여기서 좀 더 걸어가면 원형의 좀 더 큰 천제단이 나온다. 세워진 연대도 미상인 천제단은 많지는 않아도 사람들이 주위에 북적인다. 단순히 산행만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목적이 있어 이곳 태백산에 오르고 백두대간의 마지막 척추 끝에서 기원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의미를 찾지 않지만, 개인적인 믿음과 신심을 가지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래부터 선괭이눈, 얼레지, 갈퀴현호색. 갈퀴현호색은 연하늘색이 가장 잘 표현된 사진으로 올린다. 자연의 색이 주는 수줍은 듯한 연하늘색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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